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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한복판 세계가 인정한 정원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

by 리치오라 2026. 2. 12.

싱가포르로 여행 간 친구가 올린 사진 속에서 눈에 띄었던 이곳. 싱가포르 하면 초고층 빌딩과 쇼핑몰, 금융지구의 이미지가 강한데 이런 도심 속에 이런 정원이 있음에 놀라웠다. 찾아보니 이곳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곳인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 과연 싱가포르는 어떻게 도심 속에 이런 훌륭한 정원을 가꿀 수 있었는지 알아보자. 

 

도심 한복판 세계가 인정한 정원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
도심 한복판 세계가 인정한 정원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

 

1. 유원지에서 경제 식물원으로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은 1859년에 문을 열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싱가포르에서 조성된 이 식물원은 처음에는 ‘플레저 가든(Pleasure Garden)’이었다. 즉, 시민들이 산책하고 휴식을 취하는 유원지의 성격이 강했다. 영국식 조경 디자인이 적용되었고, 넓은 잔디와 호수, 나무가 어우러진 전형적인 열대 식민지 공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은 단순한 휴식 공간을 넘어 ‘경제 식물원(Economic Garden)’으로 변모한다. 이는 식물을 단순히 감상하는 대상이 아니라, 경제적 가치가 있는 자원으로 연구하고 재배하는 공간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이 식물원은 고무 재배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브라질에서 유래한 고무나무가 동남아시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대규모로 재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곳의 연구와 실험이 있었다.

이 과정은 단순히 한 작물의 성공 사례를 넘어선다.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은 열대 식물학 연구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동남아시아 전역에 식물과 재배 기술, 지식을 확산시키는 허브 역할을 했다. 영국의 큐 왕립 식물원이 묘목을 공급하는 데 주력했다면,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은 그 묘목을 실제로 식재하고 적응시키며 재배 환경을 조성하는 실험장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흔적은 지금도 정원 곳곳에 남아 있다. 초기 조경 디자인, 역사적 보호수, 오래된 건축물과 연구 시설은 이곳이 어떻게 유원지에서 과학 연구의 중심지로 발전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정원은 단순한 자연 공간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그대로 담아낸 문화경관으로 평가받는다.

 

2. 살아 있는 세계유산의 조건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유네스코는 이 유산이 ‘완전성’과 ‘진정성’을 충족한다고 평가했다.

먼저 완전성이다. 이 식물원은 49헥타르에 달하는 넓은 면적 안에 역사적 조경, 보호수, 연구 시설, 건축물, 구조물 등이 유기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국가보호수 44그루를 포함해 다수의 역사적 식물이 살아 있으며, 옛 래플스 대학 주택과 래플스 홀, 버킬 홀, 홀텀 홀 등 여러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는 단편적인 유적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진정성 역시 중요한 요소다. 많은 유산이 더 이상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채 박제된 공간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은 지금도 활발히 운영되는 식물원이자 연구기관이다. 열대 식물학과 원예학 연구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고,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 이용하는 휴식 공간으로도 기능한다. 즉, 이곳은 과거의 모습만을 재현한 장소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공간이다.

정원 디자인 역시 초기의 배치를 크게 훼손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넓은 잔디와 호수, 산책로, 역사적 건축물의 위치는 기본 틀을 지키고 있으며, 필요한 현대적 시설은 신중하게 추가되었다. 이런 점에서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은 “잘 보존된 유산”을 넘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유산”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3. 도시 한복판에서 지켜낸 초록의 유산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이런 입지는 접근성 면에서는 장점이지만, 개발 압력이라는 위험도 함께 따른다. 그럼에도 이 유산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체계적인 관리와 법적 보호 덕분이다.

식물원은 국립공원 내에 위치하며, 보존지역과 수목보존지역, 자연지역 등으로 지정되어 있다. 개발은 엄격히 규제되며, 신규 건축이나 사업은 반드시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싱가포르 계획법(Planning Act)과 기본계획(Master Plan)은 고도 제한과 건축물 형태, 주변 환경 보존 원칙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또한 완충지역 137헥타르는 저층·저밀도 주거지역으로 지정되어 고층 건물이 무분별하게 들어서는 것을 방지한다. 이는 세계유산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싱가포르는 장기적 도시 전략 계획을 통해 40~50년에 걸친 방향성을 설정하고, 이에 따라 토지 이용을 조정한다. 세계유산 보존이 도시 개발 전략과 충돌하지 않도록 설계된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관리계획(Management Plan)이다. 이 계획은 유산의 보호, 유지, 교육, 해설, 전승까지 포괄하는 기본 틀이다. 단순히 건물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유산의 ‘가치’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까지 고민한다.

이처럼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은 자연과 역사, 과학과 도시계획이 조화를 이루는 사례다. 세계유산은 과거의 영광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철저한 관리와 미래를 향한 전략이 있어야만 지속될 수 있다.

 

도시와 자연이 공존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
도시와 자연이 공존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은 고층 빌딩 숲 사이에서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공간이다. 160년의 역사, 열대 식물 연구의 중심지라는 위상, 그리고 철저한 보존 체계까지. 이곳은 단순한 공원이 아니라, 도시와 자연이 공존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다.

그래서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은 세계유산이라는 이름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 초록의 공간 속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