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은 보통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높은 성벽과 문, 그리고 방어를 위한 시설들. 하지만 수원 화성은 조금 다르다. 이 성은 단순히 적을 막기 위한 벽이 아니라, 사람이 살고 정치와 경제가 작동하는 계획된 도시였다. 조선 후기, 가장 개혁적인 군주였던 정조가 왜 이 거대한 성곽을 짓게 되었는지, 그리고 화성이 오늘날까지 특별하게 평가받는 이유를 차분히 살펴보면, 수원 화성은 조선이 꿈꿨던 미래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공간임을 알 수 있다.

1. 아버지를 위한 성, 나라를 위한 도시
수원 화성의 시작에는 한 개인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놓여 있다. 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아들이었지만, 당쟁과 정치적 갈등 속에서 결국 아버지의 명령으로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했다. 이는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건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이 사건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다.
1776년, 정조는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사도세자의 묘를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길한 곳으로 여겨지던 수원의 화산으로 옮긴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정조의 선택은 단순히 효심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 기회를 통해 조선의 정치 구조 자체를 바꾸고자 했다.
당시 한양은 오랜 당쟁의 중심지였다. 정조는 기존 정치 세력의 영향에서 벗어나 보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능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심한다. 그것이 바로 수원 화성이다. 화성은 묘를 지키는 단순한 수비 시설이 아니라, 행정, 군사, 상업 기능을 모두 갖춘 신도시였다.
1794년 착공된 화성은 약 2년 반 만에 완공되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매우 빠른 속도였다. 성곽의 총 길이는 약 5.74km, 성벽의 높이는 4~6m에 달하며, 약 130헥타르에 이르는 넓은 면적을 둘러싸고 있다. 이 안에는 관청, 시장, 주거지, 군사 시설이 함께 들어섰다. 즉, 화성은 ‘성을 쌓은 도시’이자 ‘도시를 감싼 성’이었다.
정조에게 화성은 정치적 실험장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당파 싸움을 줄이고, 실력 중심의 인재 등용을 실현하고자 했다. 수원 화성은 효심에서 출발했지만, 그 완성된 모습은 조선 후기 개혁 정치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2. 동서양 기술이 결합된 가장 과학적인 조선의 성곽
수원 화성이 다른 조선 시대 성곽과 뚜렷이 구별되는 가장 큰 이유는 ‘처음부터 계획된 성곽’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성곽이 오랜 시간에 걸쳐 증축과 보수를 반복하며 만들어진 것과 달리, 화성은 설계 단계부터 명확한 목표와 기준을 가지고 건설되었다.
이 설계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정약용이다. 그는 실학 사상을 대표하는 학자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문제 해결을 중시했다. 정약용은 중국, 일본은 물론 서양의 군사 기술서까지 참고해 『성화주략』이라는 지침서를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화성의 구조를 설계했다.
화성에는 이전 성곽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다양한 방어 시설이 등장한다. 공심돈, 포루, 적대, 암문, 봉돈 등 총 48개의 방어 시설이 성곽을 따라 배치되었다. 이 시설들은 단순히 많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변 지형과 공격 방향을 철저히 계산해 효율적으로 배치되었다. 성벽은 직선이 아니라 땅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이는 공격자에게 불리한 구조를 만든다.
특히 주목할 점은 화성 축성에 사용된 건축 기술이다.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와 녹로 같은 장비는 대형 석재를 훨씬 적은 인력으로 안전하게 옮길 수 있게 했다. 이는 공사 기간을 단축시켰을 뿐 아니라, 백성들의 노동 부담을 크게 줄였다. 조선 시대 건축에서 ‘효율’과 ‘인권’이라는 개념이 실제 기술로 구현된 사례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화성이 평지와 산지를 모두 아우르는 ‘평산성’이라는 점이다. 기존의 산성 중심 방어 개념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실제로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전제로 설계되었다. 이는 화성이 단순한 군사 시설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도시를 목표로 했음을 보여준다.
3. 200년을 건너온 기록과 복원, 세계유산이 된 이유
수원 화성이 오늘날까지 높은 평가를 받는 데에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화성성역의궤』라는 기록이다. 이 책은 1801년, 화성 완공 이후 편찬된 일종의 종합 공사 보고서다. 놀라운 점은 그 내용의 치밀함이다.
의궤에는 설계도, 공사 일정, 사용된 재료의 출처, 동원된 인력의 명단, 임금 지급 내역, 건축 장비의 구조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덕분에 수원 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파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형에 가깝게 복원될 수 있었다.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복원 작업은 이 의궤를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단순히 형태만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재료와 기법을 최대한 그대로 사용해 진정성을 유지했다. 이 점이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핵심 이유 중 하나다.
1997년, 수원 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등재 기준은 단순히 ‘아름다운 성곽’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화성은 동서양 과학기술의 교류를 보여주는 건축물이며, 군사·행정·상업 기능이 결합된 새로운 도시 모델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현재 화성은 국가와 지자체의 철저한 관리 아래 보존되고 있다. 성곽 주변 500m 이내 지역은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무분별한 개발이 제한되고 있으며, 전문 인력이 상시 모니터링을 수행하고 있다. 이는 화성이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문화유산임을 보여준다.

수원 화성은 돌과 흙으로 쌓은 구조물이 아니다. 이 성곽에는 한 왕의 효심, 정치 개혁의 의지, 그리고 실학이 꿈꾸던 합리적인 사회가 함께 담겨 있다. 2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화성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여전히 ‘사람이 살기 위해 지어진 성’이라는 느낌이 전해진다. 수원 화성이 오늘날까지도 특별한 이유는, 이곳이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조선이 꿈꾸었던 미래의 흔적이기 때문이다.